거두절미하고.


패러디다.


예전 코믹스톰에서 연재 형태로 개재되었던 콘텐츠가 있는데 '업과 치구의 만화학유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상당히 재미있게 읽기도 했었고, 이후 내가 다른 만화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포맷을 차용하기까지 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참고로 만화학 유희에서 처음으로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겸사겸사 엔하위키도.




업과 치구 두 사람이 만화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의 글이었는데, 글을 쓰는 사람 본인도 헷갈려서 나중엔 화자마다 글의 색을 달리하기까지 했다. 이게 좋은 글쓰기인지의 여부는 제쳐두고, 첫번째로 재밌었고, 두번째로 흥미로웠다.


자연스레 해당 글쓰기를 차용해서 리뷰를 작성했는데- 코믹스톰은 지금은 폐쇄됐지만 당대엔 만화마니아들이 양질의 글을 남기는 사이트로 나름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냥 고대로 갖다 쓰기는 좀 그래서 두명이 나누던 대화를 셋(알과 숑과 규)으로 나눴고, 화자의 이름도 적당히 당시 아이디를 닉네임을 변형하여 써먹었다. 글 말미에 화자가 아디오스라고 말하는 것도, 여기서 차용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후 지긋지긋하게 쓰는 알숑규라는 네임도 이 때 처음 나왔었군...


여하튼 지금 생각하면 참 hot와 젝키스런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사람 더 늘리고 그냥 본명을 갖다 쓰는 거라니.





사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꽤나 재밌는 글쓰기였다. 분량이 우습게 불어나고, 손은 세배로 많이 간다는 불편한 사실이 있긴 하지만, 연재물로서의 성격도 상당히 강해져서 나름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


실제로 이후 본진 격의 블로그에서 만화 리뷰를 하며 해당 포맷을 다시금 재활용하기도 했었다. 아마 다른 도서 사이트의 나루토 리뷰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건 블로그를 파면서 몽땅 삭제해버리긴 했지만.


여하튼 지금도 간간히 다시 쓰고 싶은 포맷의 글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패러디가 패러디인 건 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명백히 알 때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이다.


최초 연재했던 사이트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보는 메인에 해당 콘텐츠가 있었던데다, 해당 포맷을 차용한다고 밝히고 패러디라는 이야기까지 했기 때문에 나 자신도 당당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뭔가 영 애매했다.


원본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실 해당 글을 읽는 사람의 절대다수인 상황에서 패러디라는 게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득 생각이 나 구글에서 만화학유희를 검색해봤는데 비슷한 것 하나 안뜬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에반게리온을 필두로 만화에 대한 담론을 다룬 무수한 콘텐츠가 쏟아져나왔었고, 그 글조차 지금와선 회자되지 않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사이트에 연재되었던 칼럼이 회자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 자신이 패러디라고 생각하고 즐겁기 위해 글을 쓰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걸 패러디라고 인식을 못하니 영 맥이 빠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쓸 의욕이 안생긴다.


패러디로 출발한 작품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독립된 콘텐츠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게 그 케이스가 될까 고민되기도 하고. 나 자신부터가 패러디라고 생각하는 데 거기에 내 개성을 온전히 녹여도 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고....





당연하지만 복수의 화자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저작권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식이면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은 애저녁에 문을 닫았겠지.


너무나 당연하지만 내가 문장을 베낀 것도, 캐릭터를 가져온 것도, 심지어는 해당 칼럼에서 언급된 작품을 다룬 것도 아니다.


애초에 알숑규 3인 자체가 흔히 이야기하는 3인의 법칙의 룰을 따르는 냉정, 단순, 상식 포지션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쓴 것이기도 하고.


단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애초에 패러디라고 나 자신부터가 인식하고 있어서 좀 더 개성을 담지 않는다면 해당 콘텐츠로는 다시 글을 쓰지 않을 듯 하다.


아마 만은 일만 만자를, 화는 이야기 화자를 사용해서 '알숑규의 만화'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Posted by 꾸물꾸물 알숑규